나누고 싶은 이야기
얼마 전 갤럽 여론 조사와 비슷한 방식으로 주로 청년층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질문 대상은 대부분 학생이었다.
놀랍게도 그중 ”삶에 대한 당신의 기본 반응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무려 60퍼센트가 단호하게 ”불안“이라 답했다.
전혀 우울하거나 근심스러워 보이지 않는데도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서 이런 뜻밖의 답변이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대개 우리는 불안이 죽음의 위협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곧 불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준으로 위 여론 조사의 정확성을 확인하려 든다면 성과는 미미할 것이다.
우리 시대가 유독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성립되기 힘들다. 전쟁 중에 거듭 관찰된 놀라운 사실은 딱히 종교가 없는 사람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냉담한 사람과 무신론자와 허무주의자도 죽을 위험 앞에서 얼마든지 초연할 뿐 아니라 심지어 준비된 모습으로 죽음을 맞기까지 한다.
이걸 보면 삶에 대한 기본 반응이 불안이라는 답변은 결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
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삶에 대한 두려움을 가리킨다고 보면 무방할 것이다.
중년의 마르틴 루터는 심판의 하나님 앞에서 불안한 죄책감에 짓눌려 어떻게 하면 은혜의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지를 물었다.
마찬가지로 현대인도 운명에 대한 두려움, 삶의 아찔한 불운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불안은 현대인의 은밀한 상처다.
대게 불안의 원인은 부수적이거나 아예 문제 되지 않는다 ‘막연한 우려’야말로 불안의 본질이다. 불안은 끝없는 공허, 말 없는 허무,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기인한다.
그 무법천지가 두려운 것이다. 이 상황의 끔찍한 점은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성경에서 두려움과 불안의 반대는 ‘사랑’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고 요한일서에 나와 있다. 불안도 마찬가지다.
불안의 반대가 예상과 달리 꿋꿋하고 의연한 용기가 아니라서 놀랍다. 용기는 불안을 억누를 뿐이지 정복하지는 못한다. 불안을 물리치는 긍정적 힘은 바로 사랑이다.
불안은 결속이 깨진 상태고 사랑은 결속이 회복된 상태다. 세상에 내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과 내가 사랑하는 존재임을 그리스도 안에서 알 때 불안은 사라진다.
아무리 어두운 숲속에서도 아빠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아이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숨통을 조여 오는 고난에 마주 서셨다.
그러나 그분은 절망을 외치실 때도 골고다의 허공에 대고 하신 게 아니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하고 아버지를 부르셨다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으신 것이다.
- 헬무트 틸리케 님의⟪하나님의 침묵⟫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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