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이야기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위로라는 것은 어떤 특별한 게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 마음
즉 예수님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슬픔,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들에 대한 분노와 뉘우침으로 세상의 고통받는 형제들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끝까지 동행했던 그 정성만이라도 저 가여운 이들에게 쏟는 것, 그것이 위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의 고통을 바라보고 가슴 아파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답답해하는 그 마음만이라도 갖는 것,
문제 해결을 위한 직접적인 도움은 줄 수 없어도 관심이라도 갖고 들여다보고 그 아픔과 진실을 주위에 알리고
어떻게 도와줄까 궁리하고 모색하며 기도하는 그런 작은 정성만이라도 봉헌하는 것, 그것이 위로다.
예수님은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그와 같은 위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의 체념 어린 몸짓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형제들이 부활을 향한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게 만들어주는 힘이요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사흘이라는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당신의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 한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알려 주고 계시는 것이다.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죄책감과 절망이라는 고통과 죽음 속에 놓여 있던 제자들을 부활시켜 주신다.
하지만 그때 가룟 유다는 이미 자살한 후였다. 죽음과도 같은 어둠의 사흘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버텼지만, 유다는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만일 죽음보다 더 깊은 죄책감과 절망에 빠진 유다에게 단 사흘을 버티게 할 그 누군가의 위로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오늘날 유다 또한 베드로 사도처럼 회심한 신앙인으로 표본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는 그 누군가의 위로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 괜찮아, 괜찮아! 자네라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예수를 배신하고 도망친 베드로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도리어 끌어안아 주시며 위로하시는 그 누군가를 떠올려 본다.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복돋아 주어라.”(누가 22,32)
베드로의 배신과 좌절을 예감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베드로에게 당부하셨던 이 말씀은
고통이 만연한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당부이기도 하다.
이미 ’누군가의 위로로 살아가는 나‘이기에 또한 ’고통받는 누군가를 위로해 주는 나‘이어야 함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십자가로 가득한 세상은 또한 부활의 빛으로 충만한 세상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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